김재규 자녀 동생 가족 나이 고향 부인 아내 결혼
그는 유신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장으로,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육군본부에서 검거돼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박정희의 동향(경상북도 구미)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랍니다.
지난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답니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답니다. 하지만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였답니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답니다.
지난 1963년 부터 1973년 까지는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으며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으며,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답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지만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답니다.
이후에는 군사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과 더불어서,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답니다.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답니다.
1973년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의 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게 되었답니다. 그 해 12월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 9월에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답니다. 지난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으면서 의원직을 사퇴하였답니다. 이후 빈번한 소요사태 발생과 긴급조치령의 남발에 따른 정치세력간의 알력과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던 상황 속에서, 그는 주도면밀한 정보수집과 사태무마의 임무를 수행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