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 전두환씨를 필두로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일당이 1979년 12월12일에 일으킨 군사 반란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에는 관객의 분노를 유발하는 이른바 ‘빌런’이 여럿 등장한다. 무능한 탓에 반란군 승리에 길을 터준 인물부터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이들까지, 극 중 빌런들의 모델인 실제 인물들은 쿠데타 성공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지 간략히 알아보죠!
① 노재현 국방부 장관
한편,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극 중에서 오국상(배우 김의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에선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달아났다가 서울 광화문으로 쿠데타를 진압하러 온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에게 공격 중단과 직위 해제 명령을 내려 반란군 승리에 일조한 것으로 그려진다. 28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영화 관람 후기를 보면 그의 행보에 답답하고 속 터졌다는 관객들의 반응이 많답니다.
극 중 일촉즉발의 광화문 대치 장면은 허구지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씨가 군사 반란의 시작과 함께 공관에서 달아나고, 이후 반란군 승리에 밑돌을 놓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 건 사실이다. 1996년 12·12 주범들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그는 1979년 12월12일 저녁 7시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놀라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다가 이후 합동참모본부 작전국장의 여의도 소재 아파트, 한미연합사령부를 떠돌며 몸을 숨긴답니다.
이후에 반란군 핵심 전력인 1공수특전여단이 육군본부로 몰려가던 이날 자정께 전군에 병력 동원 중단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반란군을 막기 위해 출동했던 9공수특전여단이 부대로 복귀한다. 신군부 시각이 담긴 ‘제5공화국전(前)사’를 보면 노 장관은 신군부를 진압하려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가만히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도 지시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유혈충돌을 피하려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쿠데타를 용인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군사 반란이 성공한 직후인 1979년 12월14일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981년 공기업인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을 거쳐 한국화학연구소 이사장 자리를 꿰찼고, 그 이듬해엔 한국비료공업협회 회장에 올랐다. 이는 앞서 백선엽 장군이 퇴역 후 거쳐간 자리들이다. 노 장관은 1988년 62살에 퇴임했다. 이후 1991년에는 보수 성향의 관변단체 자유총연맹 총재로 선출됐습니다.
슬하에는 6명의 자녀를 뒀다. 딸 노경선씨가 재벌가인 지에스(GS)그룹의 넷째 아들 허명수 지에스건설 부회장과 결혼했다. 노 전 장관은 2019년 9월25일 93살로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②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영화 속에서 민성배(배우 유성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관객들이 오국상 국방부 장관 캐릭터만큼 답답하다는 평가를 한 인물이랍니다.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공관에서 하나회 일당에 불법 체포당한 뒤 육군 지휘계통에 따라 진압 책임을 지게 됐지만, 우유부단한 처신으로 반란군 승리에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답니다.
그는 반란군이 육군 지휘본부가 대피했던 수도경비사령부를 점령할 때 무장해제당해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그러나 이후 승진가도를 달렸다. 윤 중장은 1979년 12월24일 육군 제1군사령관에 취임했고, 이듬해 5월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거쳐 1982년엔 제23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퇴임 후인 1987년 4월 공기업인 한국석유개발공사 이사장을, 같은해 10월 대한방직협회 회장 자리를 맡았다. 이후에도 대한교육보험 고문, 현대정공 고문을 거쳐 자유민주연합 특임위원 등을 지냈다. 2017년 11월 6일 9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③ 허화평 대령
영화 속에서 전두광(배우 황정민)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육군 통신 감청을 맡았던 문일평(배우 박훈) 대령의 실제 모델은 허화평 대령이다. 반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허 대령은 12·12 사태 실무자로, 쿠데타 성공 이후 전두환씨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5공화국의 설계자’로 불리기까지 했답니다.
1980년 9월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이던 그는 준장으로 예편한 뒤 청와대비서실의 보좌관으로 임명된다. 기존에 없던 직위로, 전씨가 새로 만든 자리였다.
그는 이후 청와대비서실 산하 정무제1수석비서관 등을 지내며 실세로 권력을 누렸지만 1983년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당시 언론들은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곳에서 헤리티지 연구소 객원연구원과 수석연구원을 지내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귀국해 현대사회연구소(현 미래한국재단) 소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김영삼 대통령 취임 뒤에 치러진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도 당선됐다. 그러나 이후 12·12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가 이후 사면됐다. 현재 86살인 그는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미완의 기적’ ‘숨결이 혁명 될 때’ ‘고독하지만’ 등의 책을 썼습니다.
④ 그 외 인물들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이들은 쿠데타 성공으로 승승장구했다. 다만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12·12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이 이뤄지며 일부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특별 사면을 결정하며 석방됐습니다.
황영시 중장(영화에선 배우 안내상이 연기한 한영구)은 육군참모총장과 감사원장을 역임했다. 재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특별 사면을 받아 석방됐다. 차규헌 중장(영화에선 배우 전진기가 연기한 현치성)은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징역 3년6월형을 받았지만 사면됐다. 박희도 준장(영화에선 배우 최병모가 연기한 도희철)은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이후 여러 보수 단체에서 활동했답니다.